꿈꾸는 도시 부여를 방문하다

***답사의 이야기..···부여 부여(부여)-왜 내 나이 여기까지 여기랑 이렇게 인연이 없었을까…?충남 그 서해의 끝에 있는 태안과 서산, 안면도와 보령까지 출입하면서도 부여(부여)에는 발을 들여놓지 못 했다.또 대전과 계룡산, 공주와 청양까지 둘러보며 이 부여만은 그냥 옆으로 지나가는 같은 곳에 불과했던 것이다.그런 가운데 이번 우리 오른 충청 지역의 답사가 백제를 주제로 계속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마침내 부여를 마지막으로 2009년 공식 답사의 마지막을 장식하다고 무조건에 신청했다.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지난 익산 답사 때 마지막 부여 답사는 송구 영신 겸할 예정이며 무엇보다 참가자 전원이 자신의 고향에서 나오는 막걸리를 하나씩 들고 재미를 더함으로 해서 앞뒤를 재다 없이 갑자기 약속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갑자기 운명에도 없던 네비게이터가 차에 달리고 막 부여에도 고속 도로가 생겼다고 하니 새로운 길에 대한 호기심 천국인 저로서는, 차를 꼭 가지고 간다는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토요일 업무를 마치고 급히 여정에 나섰다.새로 손질한 차가 좀 이상이 있었지만, 그리고 나비가 엉뚱한 길을 일러줬기 때문에 망설였지만 새로 개통한 대전-당진 고속 도로 및 공주-서천 간 고속 도로를 처음 달리는 동안 마침내”부여 IC”에 진입했다.아직 공사가 한창인 길을 정체되어 백제 대교를 지나 숙소의 유스 호스텔에 도착하자 이미 음식이 준비되어 나의 코끝을 자극했다.신청자는 많지 않아서 나까지 9명인데, 그래도 한명은 내일 서울에서 내려오다니 8명···아직 신토불이님이 도착하지 않았지만 이미 각 지역의 음식과 막걸리가 나란히 기다리고 있었다.내가 가져간 것은 부산의 합동 생탁과 동래를 대표하는 기적탁주, 그리고 전통의 산성막걸리 3종… 여기 야트막한 언덕씨의 광주 무등산 동동주… 양희영씨의 공주 복분자 막걸리… 다람씨의 보령 미산막걸리··· 멜랑꼴리끄, 아름지그, 사랑님의 대전합동탁주··· 그리고 부여의 막걸리와 국순당의 생탁까지… 총 9종의 막걸리가 준비되어 있으며,홍어 무침, 검정 깨 떡, 묵은지 찜, 오리 훈제, 나물, 아사즈케 김치에 과일 등 등… 그렇긴 음식까지…이래봬도 문자 그대로 우리는 즐거운 입과 즐거운 마음에서 환상적인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늦게 도착한 신토불이님과 나가서 한잔 꺾었지만, 막걸리를 많이 마셔서인지 온 방이 뜨거워서 술이 깬 탓인지 영~월드컵이 들어가지 않아…… 그렇긴 그래서 그냥 들어가서 잠을 잤다.다음날 아침 7시에 기상하지만 어젯밤 꽤 마셨지만 별로 숙취도 없이 잘 일어났다.부랴부랴 준비해서 우리는 급히 차를 2대로 줄여서 정리한 뒤 화은테헤쟈은국 집에서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부소 산성을 보러 나왔다.부소산성…… 그렇긴 이제 본격적인 사비 백제의 수도 심장부를 보게 된다.538년, 성왕이 다소 딱딱한 땅이었던 웅진(웅진:공주)을 뒤로 하고 좀 더 넓은 땅을 가지고 있으며 북쪽 방어에 좋은 부소 산이 있는 성 흥 산성을 비롯한 사방을 수비할 수 있는 토지인 이곳 사비(사비:부여)로 옮겨온 것.그리고 위덕 왕-무왕-의자왕을 거쳐서 일본이 “마음의 고향”고 생각했을 만큼 뛰어난 문화를 창출하고 마지막으로 영화를 누렸지만 마침내 660년 나당 연합군에 의해서 나라를 잃게 된 비극의 땅이기도 하다.부소 산이 도성의 사비의 북쪽의 진산으로 해발 100m가량이다.흰색 마강변에 위치하고 왕궁을 호위하는 동시에 시가를 막는 마지막 보루인 산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기록을 보면 성왕이 천도한 때보다 거의 500년 전 동 성왕의 대에 이 부소 산에 성을 구축했다면서 천도할 때의 538년에는 증개축을 하고 완성한 것으로 추정된다.조금 늦은 오늘날 부여를 안내하는 해설사가 계셨다.보통, 어르신들이 나오는데 오늘은 매우 쾌활하고 말솜씨가 좋고 확실한 것만 자세히 설명하는 여성 분이다.우리 또래라 바로 동화가 되어 즐거운 마음으로 답사가 진행하기 시작했다.부소산성 입구의 누각을 지나면 왼쪽에 넓은 흔적이 보인다.여기에는 과거 부여의 동헌이 있었다고 한다.그 반대편 동쪽의 담 너머에는 학교가 있는데 이곳은 부여 여자 고등 학교이다.이 부여 여자 고등 학교 중에는 지금도 팔각형의 우물이 있어 학교 주변의 민가에서 수많은 석재와 초석이 나오고, 이 부근이 궁터였던 것은 아닌지…이에 나이와 비정한 거야.아울러 부여의 중심 도로인 사기 산촌 고분으로 가는 길과 수직을 이루는 궁남지에 가는 길과 서쪽 방향이며 백제 대교에 가는 길이 각각 여기에서 뻗어 나가게 보이니 옛 백제 왕궁은 부소 산을 뒤에 두고 이곳에 위치한 것이 확실한 것 같다.천천히 산 같은 언덕과 언덕 같은 산을 올라가다.발밑에는 포석이 깔렸고, 등산로 같은 느낌은 없다.잠시 오르니, 저기에 하수도 같은 것이 보이지만 이것이 놀라운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비록 지금은 낙엽과 흙 속에 파묻히고 그냥 하수 관로의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저 아래쪽에 꽤 크고 깊은 통로가 만들어지고 있다고 한다.일제가 우리 나라를 삼킨 뒤 이곳의 사비, 특히 이 부소 산과 부소 성은 일본의 미야의 내부에서 자신들의 조상의 고향이라고 생각하고 매우 중요하다고 여겼다고 한다.그래서 이곳을 복원 개발하며 오리발 마강 옆에서 왕실의 사람이나 관리가 배를 타고 오면 이런 통로를 통해서 중요한 곳에 신속하게 몰래 이동할 수 있도록 이런 시설을 만들었단다.위덕 왕의 직계 선조인 무령왕은 일본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일본의 진지 천황 등과의 관계에 대한 말이 많다.이런 점에서 보면 역시 일본의 황실에서도 백제가 우리의 뿌리임을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닌지?포석이 깔린 산길을 오르면 이렇게 낮은 언덕 같은 것이 곳 곳에 보인다.이것은 자연의 언덕이 아니라 바로 토성 흔적이다.기록에 따르면 이미 동 성왕 때 여기 부소 산에 산성을 만들었다고 나왔지만, 538년에 성왕이 여기를 수도로 정하고 산 꼭대기를 중심으로 테 메일식과 외곽 테뫼식 산성을 쌓아 만들었다고 한다.또 605년에는 무왕이 재건축했다는.길이 2.2km에 달하는 이 성곽은 위의 사진처럼 안쪽은 방어가 유리하게 되어 있으며, 외측은 비탈에 흙을 쌓아 축 받침대를 둔 것으로 하고 급함을 더하고 있다.쌓아올린 방식은 돌을 쌓은 땅은 새긴 토석 혼축식이라고 한다.잠시 걸으면 당장 큰 사당이 나타난다.이것이 바로 세 충사(삼츄은사)···카이 키 미코라고 할 만큼 뛰어난 머리와 통솔력을 갖고 있던 의자왕이었으나 어쩌다 그렇게 타락의 길을 걷게 됐는지… 그렇긴 그래도 이 3명의 충신들-성충, 흥수, 그리고 계백 장군이 없으면 백제라는 나라를 우리는 어떻게 생각했을까?게다가” 망한 나라의 역사”라고 해서 제대로 기록되는 것도 못하고 남아 있는 것조차 제대로 못한 백제이지만 실제로는 여러 면에서 신라보다 우수함을 가진 나라가 백제였지만… 그렇긴이런 생각에 빠져서, 3명의 영정에 대해서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다.세 충사은 1957년에 비로소 세웠다는.그 뒤 박·정희 서거 이후의 1981년에야 이곳을 청소하고 새롭게 단장하면서 지금처럼 중문으로 알려졌다.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지금은 그분들의 구국의 뜻을 제대로 알고 영혼을 기리고 있으니까……차츰 산길이 경사를 올리고 옆구리를 넘는다.테뫼식으로 테 메일식의 도야마 성터가 계속 우리를 끼고 나타나더니 어느새 사람들이 산책하는 길까지 내주는.이렇게 산성의 정상에 따라서 정상에 오르는 길은 “왕자의 길”로 불렸다고..···일반인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따로 낸 길이라고 들었는데… 그렇긴얼마나 올라왔나 했더니 앞에 멋진 누각이 하나 보인다. 이름을 보면 ‘영일루(迎日樓)’… 이곳은 부소산 동쪽 기슭으로 일출이 가능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이곳은 본래 산성의 동대가 있던 곳이며, 현재 세워져 있는 누각은 1964년에 홍산루라는 누각을 옮긴 것이라는 설명이다. 아침에 이곳 부소산을 운동하러 오르는 부여 사람들은 이곳에서 일출을 본다고 한다. 다시 발걸음을 옮기면 곧 넓은 곳이 하나 나타난다. 설명에는 여기가 군창지라고···1915년 어느 날 바로 아래 마을에 살던 한 소년이 여기서 덩굴을 파고 있었다.잠시 파고들자, 저것…?타고 오래 됐지만 밀과 쌀, 콩 같은 곡식이 나오지 않나..?소년은 바로 내려와서 어른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이렇게 이곳이 옛 부소산성의 군 창이 있던 자리로 나타났다는 얘기가 전해진다.백제 군은 밀려드는 나당 연합군에 곡물을 뺏기지 않으려고 스스로 불을 붙였을까.그리고 부소 산성을 빼앗기고 3천 궁녀가 한자루의 꽃이 되고 낙화암에서 강에 쓰러진 슬픈 역사와 함께 1,250여년의 세월을 메우고 있었는데, 그때의 비극을 알리면서 후세의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호나 산 기슭을 감아 온다 차가운 바람만 무심하지만 백제의 답사는 이렇게 허무와 허상이 계속 조사임을 새삼 느끼게 한다.이제 정상부와 거의 같은 높이에 온 것 같다.테메토송이 바로 옆을 돌다.토성과 나란히 걷고 있는데 다시 또 하나의 공터가 나타난다. 이곳은 성의 병사들이 살던 움막터라고 한다.본래 이곳에 움막을 복원해 놓았으나 불이 나 움막은 철거하고 옆에 철골과 유리로 된 보호소를 지어 땅에 수혈식으로 파놓은 두 채의 움막 바닥 모습만 볼 수 있게 해 놓았다.아무리 궁궐이나 귀족의 집이 잘 발달했다고 해도 가장 기본적이고 원시적인 군용 움막은 원시의 것으로 그다지 큰 차이가 없는 듯하다.1m미만으로 당을 판 뒤 기둥을 꽂는 곳은 깊이 파고들어 기둥을 설치하고 위에 움막 지붕을 덮고…이에 나이 안에는 식사를 위한 아궁이도 설치되어 있지만, 움막 지붕에는 여기에서 연기를 뽑아 창문도 있었다고 한다.우리는 단지 상상으로만 그리는 것만으로도 움막을 나와서 한 귀퉁이를 넘으면 또 하나의 누각이 나타난다.잘 보면 보름는 반)라는 김·죠은필 씨의 글로 된 현판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역시 이곳을 기반으로 정치 활동을 한 3금의 한 사람의 힘이 가볍게 느껴진다.반대 측과 누각의 내부에도 현판과 시액이 받고 있지만 사자는 사자 루)란 이름은 별로 알려지지 않은···녹(사비)과 비슷하지만… 그렇긴 헤소사붕에 들으려 했으나 잠시 부여 주변 지세와 시내 구획 정리에 대한 열변을 토하고 있어 듣지 못 했다.갑자기 숙제가 되었네요… 그렇긴부여는 수도가 되어 기본구획의 정리를 확실하게 하였다. 먼저 부소성문 앞에서 남북을 따라 주요한 장축을 이루는 일직선의 길을 만들었는데, 중간에는 정림사라는 왕실 사찰을 세우고 그 끝에는 별궁지라 할 수 있는 궁남지를 두었다.위 사진에서 왼쪽 소나무 숲 가장자리에서 오른쪽 상단을 향해 비스듬히 뻗은 길이 그것이다산성의 입구인 왕궁 앞 남쪽 키타오 오지는 수직을 이루고 동쪽으로 뻗은 동서 대로는 지금도 국도가 되어 웅진에 다시 왕의 능이 있는 사기 산촌 고분 측에 이어진다.멀리 성 흥 산성을 비롯한 부여 외곽 생땅에 모두 산성이 위치하고, 부소 산을 중심으로 강 건너 편 부산, 부소 산의 동쪽 아오야마, 남동 측의 금성 산 등에도 모두 우치지로 자국이 지금도 남아 있다.이처럼 백제는 123년 동안에도 뛰어난 수리 건축과 토목 기술을 발휘하고 제대로 된 수도를 만들어 낸 것이다.강 건너 부산과 가까운 왕 신 사지의 사이에는 백제 역사 재현 단지를 현재 건설 중이라고 하지만 그 모습이 제대로 나올까···자못 궁금하다.사이로 백마강은 유유히 오늘도 흘러간다.오랫동안 누각에 기대 앉아 해설사의 갖가지 부여 이야기를 들은 우리는 이제 산 아래 백마강 쪽으로 계단길을 따라 내려간다. 등산할 때는 씩씩하게 잘 걷던 아름지그님이 웬일인지 발걸음을 많이 옮긴다. 들어보니 수술을… 에~! 그랬구나… 모두 무릎과 관절을 조심합시다! 마침내 도착한 것은 바로 낙화암-백제가 망하던 그날 삼천 궁녀들이 몸을 날려 백강에 몸을 던졌다는 바로 그 바위이다.망국의 한을 품고 한 점의 꽃이 되어 사라져간 그녀들의 아픔이 스며든 곳-그 바위 위에는 육모 백화정이 그대로 앉아 오늘날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숨을 돌릴 자리를 마련하고 있다.3천명의 궁녀가 과연 빠져서 죽는 것일까…?그들은 스스로 자결했을까…?아니면 개인의 의지였던 것일까…?아니면 집단적인 패닉 상태에서 너도나도 빗나갔을까…?상황은 선명하게 그려진다.나당 연합군이 부소 산성을 뚫고 여기까지 올라온다.여자들은 전장에서 가장 비참한 존재가 될 수 있다.그것도 이제 망국을 앞둔 나라의 궁정 궁녀들이다.군인들이 눈독을 들이는 것도 당연하다… 그렇긴 하지만 그들은 적군의 남자들에 짓밟히며 죽기 전에 깨끗한 죽음을 선택한 끝에 몰린 이곳에서 몸을 날리다.그런 것일까… 그렇긴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이런 주제로 담장에 기대어 여러가지 이야기를 했다.그리고 그런 화제를 각각 마음 속에 묻은 채 단체 사진 한장!강 건너편에는 멀리 조성 중인 백제 문화재 연역 사단지가 보인다. 역시…일본의 목탑양식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부디 백제의 화려하고 찬란한 수준 높은 문화를 제대로 재현해 사람들이 올바른 역사인식을 할 수 있는 곳이 되기를 바란다.이제 음악과 독경 소리가 함께 들려오는 곳으로 향한다.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는 뜻밖에도 예상을 깨고 ‘꿈꾸는 백마강’이 아니다···예전부터 익히 알고 있는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운다···’가 아니다. 또 다른 백마강 노래라고 한다. 한번 찾아보자. 독경 소리는 당연히 고란사에서 들려오는 것이겠지……빙빙 돌고 백마강을 따라 내려가는데 겨울 바람이 무심히 불어와 우리의 얼굴을 때린다.점점 목탁 소리가 명확해지는데, 발 밑으로 강변에 비좁게 붙은 땅에 의지하여 지어진 길쭉한 형태의 절이 나타난다. 바로 골란사다.가오란 절의 역사를 찾아보았다… 그렇긴정확하지는 않지만 백제 때부터 갖고 있던 사찰인, 아하 신뢰 왕 때 건립되었다고 전해진다.그러나 부소 산성 내에 지어진 이 절은 왕실과 관련한 고찰했을 가능성이 높고 혹시 경관과 관련해서 정자가 있는 곳에 절을 진 것 아닌가 싶다.또 다른 전해지는 이야기는 3천 궁녀들이 빠지고 죽은 낙화암 아래에 이를 기리고 고려 현종 때 세워졌다고도 한다.어쨌든 정확한 기록이 있지 않기 때문에 답답하다.전라 충청 지역의 사찰이 거의 그렇듯, 경상)지역처럼 막대한 절 세력을 보이고 주는 곳은 별로 없다.비록 규모가 큰 사찰이 있다고 해도, 웅장하고 엄숙한 모습보다는 사랑스러운, 보다 친근한 사원 구조를 갖는 것 같다.가오란사 역시 그리 넓지 않은 곳에 세워진 때문인지 계속 이어지고 있는 건물이 소박하게 앉아 있다.멀리서 본 현판의 글씨가 낯이 익지 않나!!!이라고 하면 역시..···바다에·김규진(김·규징의 글씨이다.도대체 그의 발이 닿지 않는 한국의 사찰이 있을까..?이 서체는 비교적 자유 분방하게 쓰여서 아무래도 그의 후기 작품 같다.경내 뒤편으로 돌아보다. 고란사 약수는 바위에서 솟아나는 석간수(石間水)로 예로부터 유명한 것이라고 한다. 이곳 바위틈에만 자라는 특별한 식물인 고란초 잎을 따서 이 약수 위에 띄워 마셨다고 하는데, 지금은 한쪽 구석에 이렇게 비좁은 아크릴 통 안에서만 볼 수 있다. 대략적인 설명에 의하면 고사리과의 식물이라고 하는데, 이곳 이외에서는 볼 수 없으므로 골란초라고 한다.약수 전의 전각 한쪽 벽에는 묘한 그림이 그려지고 있으나 자세한 설명이 붙었다.때는 서기 5백 열 여덟년/섬 놈과 며느리 이시이는 일본의 소녀 셋이서 불교를 알다/비구니가 되기 위해/목숨을 걸고/현해탄을 건너서 유학의 길을/여기의 고란정사에/선택했다고 한다.응..?이건 도대체 무슨 말인가..?가서 여기저기를 찾아봤지만 의외로 이 이야기는 “일본 서기”과 “후소 약기”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는 이야기였다.일본의 당시의 세력가인 소가노 우마코가 개인적으로 운영하던 불당인 이시카와 내원정사에 3명의 뛰어난 비구 스님이 초청되지만 그 중에는 당시 왕실 불상 제작 책임 기술자 중에서 가장 최고였던 시바 타츠 타카( 하면 중:츠카사)의 딸 시마(시마:시마)이 있었다.그녀는 법명이 선신니(지에 응 진짜 계집년:선신니)에서, 나머지 두명은 각각 혜선년(에 지에 님의 계집년:케이)와 선장 비구니(지에어 정의 계집년:선장년)이었다.그들은 중대한 사명을 띠고 이듬해 588년 위덕 왕의 허락 하에 본국(백제)에 3년 유학하게 되지만 그 가운데 선신 비구니는 형법학을 배우는 일본 불교에서 율장의 시조가 됐다는 것이다.그런데 성왕 때 왕명으로 인도에 직접 건너고 율장을 배우던 겸익(겸익)과 왕에 율소(률소)을 지어 바쳤다고 전해지는 혜민, 댐 우크라이나 법사의 말이 있다.만약 선신 비구니가 율장을 익혔다면 그들과 관련이 아는데, 특히 이 가오란 절 창건 설화에 전해져아신 왕 때 후이민 보시가 만약 성왕 때 후이민과 동일 인물이라면 여기의 고란정사에서 여승들이 머무는 것은 아닌지?이는 완전히 추측에 불과하지만… 그렇긴일본에서 배를 타고 금강에 시라에를 거쳐서 들어오면 저 배처럼 여기에 온 것이다… 그렇긴과연 이런 추정이 믿을 만한 것…?그런데 놀랍게도 일본의 학자들조차 이를 확실시되어 왔다는 것이다.아래의 글은 http://blog.naver.com/ecorama/120095442285(올빼미의 블로그)을 참조한 것이다.1910년에 이 땅을 강제 합병한 일본은 “내선 일체”을 내걸고 역사를 왜곡하거나 자신들의 역사관을 우리의 역사에 강제 편입 등의 작업을 시작했다.1920년대에 지자 이곳 부여 땅은 그들의 조상의 고향(본국)로 미화하기 위해서”재단 법인 부여 고적 보존회”라는 단체를 결성하고 낙화암 등에 백화정을 짓고 관광 유람선을 백마강에 띄우는 등 이곳을 성지인 관광지화하고 많은 일본인과 조선인을 견학·관광시키고 자신들의 내선 일체화 선전에 교묘히 이용하게 됐다.1932년 이곳 부여 박물관의 전신인 “백제관”관장에 부임한 오사카 킨타로는 바로 이런 추정을 내걸고 여기의 고란정절을 더 부각했다.이에 부여 고적 보존회에서는 고란정절을 양국의 선린 우호의 상징으로 받아들이고 대대적인 개수를 실시한다.일본에서 배를 타고 금강으로 백강을 거쳐 들어왔다면 저 배처럼 여기에 왔을 것이다··· 과연 이런 추정이 믿을 수 있을까…? 그런데 놀랍게도 일본 학자들조차 이를 확실시해 왔다는 것이다. 아래 글은 http://blog.naver.com/ecorama/120095442285( 올빼미 블로그를 참조한 것이다. 1910년 이 땅을 강제 합병한 일본은 내선일체를 내세워 역사를 왜곡하기 시작하거나 자신들의 역사관을 우리 역사에 강제로 편입시키는 등의 작업을 시작했다. 1920년대에 이르러 이곳 부여 땅은 그들 선조의 고향(본국)으로 미화하기 위해 ‘재단법인 부여고적보존회’라는 단체를 결성하여 낙화암 등에 백화정을 짓고 관광유람선을 백마강에 띄우는 등 이곳을 성지이자 관광지화하여 많은 일본인과 조선인을 견학·관광시켜 자신들의 내선일체화 선전에 능수능란하게 이용하게 되었다. 1932년 이곳 부여박물관의 전신인 ‘백제관’ 관장으로 부임해 온 오사카 긴타로는 바로 위와 같은 추정을 내세우며 이곳의 고란사를 더욱 부각시켰다. 이에 부여고적보존회에서는 고란사를 양국 선린우호의 상징으로 받아들여 대대적인 개보수를 진행한다.숭각사의 초석에서 보면 좀 더 연대가 가진 것처럼 보이는데···고려 시대 이전의 것으로 보인다.1915년 사진에서 보면 이러한 초석을 쓰는 집은 아니지만, 여기 그 이전부터 존재했는지, 부근에서 가져온 것…… 그렇긴 그렇게 대부분의 부소산성의 답사는 끝났다.끊임없이 들려오는 “백마강…”노래를 싣고 나의 귓가를 지나가는 강바람만 무심하다.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부소산성 답사는 사람의 마음을 외롭게 하고 슬프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한다.그것이 백제 답사의 기본적인 특징이기 때문… 그렇긴(하행길에 만난 기온<기원>절의 사이후쿠지<서복>이야…역시 흔적만 남아 황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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